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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8
  • Date2017-08-08
  • Host일광전구
윤광준의 新 생활명품 58 일광전구
  • Date2017-08-08
  • Host일광전구

여인의 ‘조명 빨’ 살리는 따스한 불빛 

 

 

자세히 봐야 보인다. 유럽의 도시를 가 봤다면 우리와 다른 점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밤 길가에 비치는 불빛의 편안함이다. 가로등이나 건물의 조명이 눈부실 만큼 밝지 않다. 빛의 느낌은 또 어떤가. 빛의 색깔을 표시하는 기준인 색온도가 우리보다 낮아 차분하다. 도시 곳곳 어디에도 정신 산란해지는 과잉의 빛과 마주치는 경우는 드물다. 일정한 기준과 규제에 따르는 조명이 도시를 비추는 것일 게다. 

 

우리나라에 돌아온 순간부터 서울의 밤이 다르다는 걸 알아챈다. 불빛의 차분함은 찾아보기 어렵다. 눈을 찌를 듯한 강렬한 LED 라이트의 빛 공세로 온 도시가 어지럽다. 가로등 불빛도 들쭉날쭉하다. 불을 밝게 켜는 것이 조명이란 사람들의 믿음은 완고하다. 국내에서 조명 디자인이란 분야를 처음 개척한 친구의 한탄도 다르지 않다. 자연의 빛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을 아우르는 적정한 기준과 편안함이 있어야 옳다. 빛 공해로 부를만한 서울의 밤거리는 하나도 자랑스럽지 않다.

 

집 안의 사정도 별반 다를 게 없다. 아파트 건물 시공업체가 달아놓은 천편일률의 조명기구를 당연하게 여기며 산다. 여기서 나오는 밝고 창백한 빛이 서로의 얼굴을 시체 색처럼 보이게 해도 별 불만이 없다. 조명이란 의례 그러려니 생각하는 일상의 관성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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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빛의 질을 따지는 사회  

 

 

사실 앞만 보고 살았던 시절, 빛의 질까지 따지긴 어려웠다. 전원 효율 높은 형광등은 자연스런 선택이다. 특정 파장에 치우쳐 연색성 떨어지는 푸르스름한 빛의 창백하고 불안한 느낌이 좋았던 건 아니다. 만들어진 것을 어쩔 수 없이 써야 하는 소시민의 푸념까지 챙겨주지 못한 조명회사의 무관심과 역량 때문이기도 하니까. 

 

형광등 불빛을 싫어하는 이들은 백열전구를 썼다. 필라멘트를 달구어 내는 빛은 모닥불 닮은 따뜻함으로 넘친다. 단점은 전원효율이 매우 낮다는 거다. 소비전력 대비 빛이 어두울 수밖에 없다. 에디슨이 백열전구를 만든 이래 120년가량 세상의 밤을 밝히긴 했다. 환경규제가 심해진 최근 여러 나라에서 생산 중지 결정을 내렸다. 우리나라도 2013년부터 더 이상 가정용 백열전구를 만들지 않는다.  

 

조명등의 효율을 높인 연구와 투자의 결과가 LED 라이트다. 현재 세상의 밤을 밝히는 주역이 된 배경이다. LED는 기존 전등의 전 영역을 빠른 속도로 대체해 나간다. 소비 전력이 적고 밝은 빛을 내는 장점 덕분이다. 효율만 따지면 LED가 단연 돋보인다. 문제는 빛의 특성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까지 좋다고 할 수 없는 부분이다. 너무 밝아 눈이 부시고 날카로워 피곤한 느낌이 든다. 품질 낮은 LED 라이트의 불빛은 깜빡거림도 만만치 않다. 한마디로 밝기는 하나 기분은 썩 좋지 않은 불빛이다.  

 

LED의 확산과 불빛의 느낌이 문제로 불거지기 시작했다. 최근 로마 시민들은 “LED 가로등의 불빛이 도시의 낭만을 해친다”는 불평을 쏟아내고 있다. 로마시가 비용 절감을 위해 노란 불빛의 기존 나트륨 전구 가로등을 백색 LED 등으로 바꾼 탓이다.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조차 “로마에 초현대식 LED등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목소리를 냈다. 온 도시가 유적지인 로마는 분위기를 해치지 않기 위해 그동안 도로 정비도 하지 않았다.  

 

로마 시의회와 시민단체는 즉각 반대 운동을 벌이고 있다. 로마의 역사지구가 병원이나 시체 보관소 같은 분위기로 바뀌었다는 이유다. 로마 특유의 따뜻한 분위기와 오랜 역사 도시의 매력이 LED 가로등의 불빛 하나로 망쳐진 예다. 로마 중심부에 사는 주민들은 ‘창문 앞에 양초 놓기’ 운동까지 벌이고 있는 중이다. 이들은 LED 등으로 바꾸지 말거나 밝기를 조절해 눈부심 없는 로마의 밤거리를 원하고 있다.  

 

불빛의 질까지 따져가며 도시의 전통을 이어가려는 노력은 현실성 없는 남의 이야기 같다. 우리나라 도시 어디에서도 조명의 분위기를 탓하는 섬세한 노력은 본 적 없다. 더 크고 높은 건물을 자랑하듯 더 밝고 화려하게 불 밝히는 데만 관심이 모아졌기 때문 아닐까. 인간의 감정에 빛만큼 크게 영향을 끼치는 것은 없다. 빛은 생존을 위한 중요한 에너지이기도 하다. 빛의 밝기만큼 성분과 느낌도 따져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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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용 백열전구가 사라진 시대의 고집

 

 

빛의 느낌과 분위기까지 깐깐하게 따지는 전구가 있다. 대구에 있는 일광전구의 제품들이다. 1962년부터 백열전구만 만들어온 오래된 회사의 믿음이 듬직하게 배어있다. 디자인 잡지를 통해 존재를 알았고 몇 제품은 이미 쓰고 있다. 얼마 전 코엑스의 디자인 페어에서 회사의 대표를 우연히 만났다. 여전히 백열전구를 만들어내는 이유를 다짜고짜 물었다. 너무도 상식적이고 당연한 대답이 돌아왔다. “백열전구의 불빛은 따스하고 아름다워요.”

 

불빛에 홀려 모두 포기한 백열전구를 여전히 만드는 남자의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회사를 방문해 생산과정을 직접 보고 싶다고 했다. 대구의 공장을 찾아 내 눈으로 확인하기까지 채 일주일이 걸리지 않았다. 현행법에선 일반 가정용 백열전구를 제외한 산업용과 장식용 전구만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일광전구가 장식용 전구까지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다. 여전히 백열전구의 따뜻한 불빛과 느낌을 사랑하는 이들이 남아있다는 확신 때문이다.

 

일광전구의 클래식 시리즈에 자연스레 눈길이 갔다. 막연하게 그렸던 백열전구의 형태가 실물로 완성되어 있었다. 평소 보던 전구의 모습이 아니다. 초기 진공관인 가지 모양의 벌룬형과 평소 보던 백열전구를 3배 정도 키운 대형 전구도 있다. 빛을 내는 부분인 필라멘트의 배열도 독특하다. 물고기 형상을 했는가 하면 병렬구조의 일자형도 있다. 필라멘트에 불이 들어오는 것만으로 전구는 빛을 내는 장식물이 된다.  

 

고효율 LED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다. 백열전구의 불빛이 여전히 필요한 사람들의 선택을 위해 일광전구가 있다. 분위기를 위한 감성의 공간에 빛의 디자인으로 끼어들면 된다. 형광등 불빛에 민감한 암환자의 고통을 백열전구의 불빛으로 진정시킨 건 사실이다. 자연의 빛에 가까운 파장과 색감이 뇌파의 안정을 이끈다는 연구결과도 사실이다. 자연의 빛에 가장 편안하게 순응하는 인간의 습성이 백열전구와 화합한 일은 자연스러울지 모른다. 모닥불 앞에 둘러앉았던 인간이 대용의 촛불을 실내로 끌어들였다. 필라멘트를 태우는 전구의 불빛은 촛불의 확장임을 잊으면 안 된다.  

 

너울거리는 촛불 앞에 앉은 여인의 얼굴이 못나 보일 리 없다. 따스한 불빛이 감도는 백열전구에 비친 여인의 얼굴 또한 예쁘게 보인다. ‘조명 빨’ 효과를 부정해선 안 된다. 인간의 마음이 빛의 효과에 흔들리는 점을 인정하자. 일광전구는 클래식 시리즈로 2014년 일본의 굿 디자인 상을 받았다. 포장박스의 디자인까지 세련되어 보였던 이유를 수긍했다. 빛을 디자인의 대상으로 여겼던 인간의 대응은 남다른 데가 있다.  

 

짜증나는 집 밖의 조명은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 탄소배출을 줄이기 위한 노력은 당연히 해야 한다. 이미 세상은 LED 라이트로 주 조명이 바뀌었다.  

 

일광전구는 적어도 집 안의 조명만은 원하는 대로 만들어준다. 효율에 가려져 잃어버린 따스한 불빛의 재현으로 위안 삼는 것은 어떨까. 꼭 필요한 부분과 장소에 일광전구 클래식 시리즈를 달았다. 잠깐 동안의 따스함과 불빛의 위안까지 다 포기할 순 없는 일이기에. 백열 전등 하나만 켜고 나머지 조명을 끈 채 음악을 듣는다. 어둑한 실내에 부드러운 불빛이 번진다. 불현듯 드뷔시가 달빛에 비친 물살을 가르며 다가오는 환영에 깜짝 놀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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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광준 : 글 쓰는 사진가. 일상의 소소함에서 재미와 가치를 찾고, 좋은 것을 볼 줄 아는 안목이 즐거운 삶의 바탕이란 지론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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